Thursday, 25 November 2010

We Are The World



올해 아이티 대지진 이후 다른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던 'We Are The World: 25 for Haiti'의 1985년 원곡입니다.

Michael Jackson과 Lionel Richie가 만들고 마법사 Quincy Jones가 프로듀싱했던 곡에 당대 미국 최고의 가객들이 모였습니다.

영상에서 보는 것처럼 곡을 만든 두 사람과 함께 다른 19명의 가수들이 모여

We are the world
We are the children
We are the ones who make a brighter day
So let's start giving

이라고 노래하며 아프리카 기아 구제를 호소했습니다.

곡과 가사도 좋지만, 짧은 소절 내에서 각자의 개성과 음악성을 강하게 전달하면서도 전체적인 조화를 유지하니 최고들답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룹 Journey 출신의 Steve Perry, 재즈 보컬리스트 Al Jarreau의 팬입니다만, 85년 당시 30~50대의 나이로 한참 활동 중이던 그들 이외에도 John Oates나 Bette Midler, Bob Geldof 같은 뮤지션까지 코러스로 참여했으니 당시로도 그랬고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 같은 위대한 순간입니다.

이 노래 덕분에 Ray Charles 할아버지가 부른 노래의 마지막 구절처럼 남을 돕는 일이 다름아닌 우리 스스로를 위하는 일일 거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Saturday, 20 November 2010

순위 매기기의 허점

우리 사회가 선진국을 쫓아 따라 온 덕분(?)인지 선진국에서 평가한 잣대에 크게 휘둘린다. 우리는 외국에서 어떤 분야나 기관, 나라를 평가한 후 순서를 매긴 결과를 가지고 우리끼리 비판과 비난을 일삼고 나서는 다음 번 평가결과가 나올 때까지 그냥 또 잊어버리곤 하는 일에 아주 익숙한 것 같다.

그 중 하나가 대학별 순위 매기기다. 전세계 대학을 대여섯가지 항목에 가중치를 두어 평가하는 것에 허점(虛點)이 있음을 지난 주 뉴욕타임스가 기사화했고 우리 신문이 이를 인용해서 보도했다. (외국에서 보도하기 전에 우리 신문은 왜 이런 정도의 기사를 못 쓰나 모르겠다.)


New York Times(11월 14일자) Questionable Science Behind Academic Rankings

조선일보(11월 15일자) NYT, 세계 대학순위 평가, 너무 믿지 마라


신문이 지적한 대로 The Times와 QS사에서 매년 발표하는 대학 순위는 가끔 일반적인 평판과 다른 결과가 나오기도 하고 매년 순위가 크게 뒤바뀌는 학교들도 많아 100% 신뢰하기에는 위험이 따른다. (우리 언론에서 매년 열심히 보도하는 중국교통대학 발표 순위는 더 엉터리다.) 평가기관이 몇 가지 항목을 계량화(計量化)한 것에 대해 자의적으로 가중치를 둔 후 단순 계산해 내기에 엉뚱한 결과가 섞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신문 기사에서 인용한 아인슈타인의 멋진 표현대로 "계량화되는 것이라고 다 중요한 것은 아니며, 모든 중요한 것들이 계량화되는 것은 아닌데도(Not everything that can be counted counts, and not everything that counts can be counted)" 우리는 평가결과에 매우 민감하다.

그러나 이 평가결과보다 더 문제시해야 할 것은 외부에서 이를 비판의 잣대로 이용하는 사람들의 태도다. 평가 결과를 가지고 약점이 무엇이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할지 말지 판단해야 할 몫은 해당 기관이나 학교에 있지 언론이나 일반인 등 제3자가 가지는 게 아니다.

서울대학교가 100위권에 간신히 들었던 몇 년 전,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우리나라 최고 대학 서울대가 이 모양이냐며 일반 여론이 상당히 안 좋았다. 평가항목 하나 하나를 들여다 보면 서울대가 평가에서 단기간에 최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가기 상당히 힘든 구조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는데도 이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순위를 올리려면 외국인 교수, 외국인 학생수의 비율을 높여야 하고, 많은 졸업생들이 국내기업보다는 가급적 외국 유수의 기업에 입사하여 좋은 평판도 쌓아야 한다. 학생수 대비 교수 비율을 높이려면 학교에 대한 지원도 국민의 세금으로 보다 과감하게 해야 하고, 논문 인용실적을 높이려면 학문적 성과와 별 무관해 보이는 일부 예능계 학과는 폐지해야 하는데, 비판하는 자 누가 또 이것을 쉽게 동의하고 해결해 낼 수 있겠는가?

올해 QS평가에서 학문적 평판도가 33위인 서울대는 다른 항목에서 평가가 안 좋았음에도 전체 순위에서 50위를 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인 듯하다. (평가항목 중 외국인 교수/학생 비율의 순위는 281위다. 이는 아시아권 대학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약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자들이 올해 평가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작년 47위에서 세계단 하락한 것이리라.

어쨌든 만 7천여개나 된다고 하는 전 세계 대학 중 500위 안에만 들어도 상위 3% 이내인 점을 감안하면 서울대를 비롯 우리나라 유수의 대학들이 그리 나쁜 결과를 얻은 것도 아닌데 그 평가와 무관한 사람들이 여론 재판식으로 비난하는 것은 참 문제다. 그런 분들에게 조용히 묻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은 대체 전 세계 몇 위권이시길래?"

Sunday, 7 November 2010

Gender arbitrage

최근 이코노미스트에 재밌는 기사가 실렸다.

Gender arbitrage in South Korea - Profiting from sexism

한국은 Gender Arbitrage에 가장 이상적인 환경을 갖춘 나라라는 것이다. Arbitrage란 시장간에 가격차이가 있을 때 물건값, 금값, 돈값(환율) 등등이 싼 시장에서 사서 비싼 시장에 내다팔아 거래차익을 얻는 일을 말하는 경제학 용어다.

이런 Arbitrage를 Gender에 붙인 것 자체가 재밌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외부에서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참신하다.

이 기사의 요지는 한국사회의 고학력 유능한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저평가되어 있고 한국 기업의 성차별적인 고용관행 때문에 대접을 못 받고 있는 상황에서 다국적 기업이 손쉽게 그 유능한 여성들을 고용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업에서 여성 관리자 비율이 10%씩 올라갈 때마다 기업의 수익률이 1%씩 증가한다고 하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Jordan Siegel의 분석으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성차별적 고용관행을 통해서 외국의 다국적기업이 상대적인 이익을 얻고 있다고 하는 얘기는 다소 단선적인 듯하다. 우리 기업문화에는 분명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긴 하지만, 이에 덧붙여 우리 직장생활이 머리를 써서 효율적으로 일하기 보다는 밤낮으로 몸을 던져 장시간을 버텨내야 능력을 인정해 주는 노동집약적이고 거친 남성문화가 강하기 때문에 여성들이 상대적인 열위에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다. 물론 우리 여성들이 그런 환경을 선호하지도 않을 것이다. 일을 시간과 몸으로 때우는 비능률적인 근무환경일수록 여성들에게 매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 땅에서 외국 회사들이 Gender Arbitrage의 기회를 누릴 수 있는 것이리라. 즉, 성차별적인 환경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 불리한, 쿨cool하지 않은 우리의 후진적인 기업문화가 여성들이 외국기업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도록 내모는 측면도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글로벌 스탠다드'와 동떨어진 우리의 선택과 우리 환경이 어떤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지 이 기사는 지적하고 있다. If we don't, our rivals will.

Friday, 24 September 2010

저소득층에 대한 컴퓨터 보급 - 우리나라 사례연구

지난 7월에  '디지털 디바이드와 저소득층에 대한 컴퓨터 보급'이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문제점을 인식했는지 서울시교육청에서 서울대에 연구를 맡긴 모양입니다.

아래 링크는 "저소득층 컴퓨터 지원했더니 되레 성적 떨어져"라는 제목의 조선일보 기사입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24/2010092401580.html?Dep1=news&Dep2=headline1&Dep3=h1_09

지원 정책을 펼치기 전에....또는 정책도입 초기에....현상과 문제점을 분석해서 보완하고 시행했으면 좋았을텐데, 이렇게 사후약방문입니다.

그 결과는 역시나 미국의 연구결과와 같았습니다. 늦었지만 다행히도 이런 결론을 얻었으니 그 보완책을 기대해 봅니다.


* 아래에 조선일보 곽수근 기자의 9월25일자 기사 중 일부를 다시 인용합니다.

"정부와 지자체, 교육당국이 저소득가정 어린이들의 정보화 능력을 높이기 위해 컴퓨터와 인터넷 통신비를 지원하는 정책이 오히려 학업성취도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서울시교육청이 지난 7월 서울 시내 초등학교 4년생 5000여명을 표본삼아 분석했더니 컴퓨터나 통신비 지원을 받는 한부모 가정의 자녀들이 하루평균 20분 컴퓨터 게임을 더 많이 하고, 국어·영어·수학 평균 점수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교육청은 "형편상 컴퓨터 구입이 어려운 한부모가정 등 저소득층에 컴퓨터와 인터넷 통신비를 집중 지원했더니 오히려 공부 시간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다"며 "한부모가정 자녀들의 국·영·수 평균 점수가 양(兩)부모 자녀보다 5점 정도 낮은 것으로 조사되는 등 컴퓨터 게임으로 인한 성적저하가 눈에 띄었다"고 밝혔다. 정보격차를 줄이기 위해 추진한 저소득층 지원사업이 학력격차를 심화시키는 역효과를 냈다는 것이다.

조사·분석을 맡은 박현정 서울대 교수는 "컴퓨터 게임을 1시간 더 할수록 국·영·수 평균점수는 2.3점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저소득 가정 정보화지원 사업이 자녀들의 정보화 소양을 높이는 효과는 미미한 반면, 컴퓨터게임에 빠져 성적이 떨어지는 현상은 뚜렷했다"고 말했다. "

Sunday, 1 August 2010

'주는' 관계...코레 아일라

우리는 거래와 은혜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음식점에서 국밥 한 그릇 사먹고 나서 이 집에서 '내가 팔아줬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문제가 또다시 거론되는 걸로 봐서는 대기업들도 납품하는 중소기업에게 물건을 '사줬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서로의 필요에 의해 거래를 하고도 마치 돈을 내는 한쪽이 다른 쪽에게 시혜를 베풀어 준 것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물론 여러 개 중 하나를 선택할 권한이 있는 소위 '갑'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거래에 대해서도 '을'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음식점과 중소기업이 '을'이 되겠지요.

오늘 조인스에 실린 아래의 글은 최근 한국과 리비아 사이에서 벌어진 외교사태에 대한  한국외대 서정민 교수님의 기고문입니다.

http://news.joins.com/article/912/4352912.html

리비아에서 우리 기업들이 맡았던 대수로 공사에 대해서 우리는 양국간 우호협력관계의 상징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비해 리비아 사람들은 한국이 돈을 받고 벌인 사업이며 거래였을 뿐이라는 생각이 크다고 합니다.  

이걸 굳이 우리 사고방식으로 따져 보자면 결과적으로 리비아가 다른 나라 대신 우리나라 기업에게 공사를 맡겨 은혜를 베풀어 주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조차도 우리는 리비아에서 대수로 사업을 '해 준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 기고문 중 '중동의 상당수 지식인은 한국을 경제 동물로 오해'한다는 내용이 우리를 반성케 합니다.
 
반면, 같은 이슬람 문화권인 터키 Turkey 는 1950년 6.25전쟁에 15,000명의 젊은이들을 한국에 '파견해 주고도' 자신들의 나라가 한국에 대해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터키와 한국은 같은 피를 나눈 혈족이며 우리나라를 형제의 나라로 생각하니 같이 싸워주는 게 당연하다는 거지요. Koreli라는 단어가 '한국인'을 일컫기도 하지만 '한국전에 참전한 터키군인'을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는데, 하나의 터키어에 한국인과 터키인의 의미를 같이 포함하고 있는 것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그들의 마음가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터키인들은 이 땅에서 그들의 소중한 700여명의 젊은이들을 잃어버리고, 우리가 그들을 제대로 기억해 주지 못 하는데도 한국어로 또박또박 '사랑해요 한국, 나는 참전군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장면은 금년 6월 MBC에서 6.25특집으로 방송한 '코레 아일라'라는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방송은 60년 전 한국전에 참전했던 '슐레이만 비르빌레이'라는 85세의 터키인이 한국에 두고 온 당시 5세의 고아, '아일라'라는 한국여성을 찾는 내용으로 정말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사람간의 관계나 국가간의 관계가 한쪽이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고 생각하면 그걸 상대편이 고마워해야 하는 어색한 의무적 관계보다는, 사랑과 신뢰가 바탕이 되어서 어려울 때 대가없이 돕고 서로 잘 되기를 기원하며 멀리서도 그리워하는 관계가 될 때 한 차원 높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음을 '코레 아일라'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 '코레 아일라' 방송 보기
http://turkeykorean.net/bbs/zboard.php?id=koregazi&no=9 
(이 글의 '[MBC특집] 코레 아일라 방송보기'라는 제목을 클릭하면 동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Saturday, 24 July 2010

'디지털 디바이드'와 저소득층에 대한 컴퓨터 보급

현대 사회에서는 정보능력에 따라 부와 권력이 좌우된다고 한다.
인종이나 계층별 정보 능력과 정보 접근성의 불균형에 따라 사회경제적 격차가 발생하고 이러한 격차는 또다시 대물림되는데 이와 같은 '디지털 디바이드 (Digital Divide)'의 폐해를 줄이기 위하여 정부가 시행하는 저소득층에 대한 컴퓨터 보급은 과연 효과가 있을까?

아래 링크는 '이창양 교수의 경제산책'에 소개된 뉴욕타임스 기사 내용이다.

 "Computers at Home: Educational Hope vs. Teenage Reality"(2010.7.9)

이 기사에서 소개된 세 개의 연구는 유사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저소득층에 대한 컴퓨터 보급은 교육적으로 거의 아무런 효과(little or no educational benefit)가 없다는 것이다.

시카고대학의 Ofer Malamud 교수팀이 2009년 루마니아에서 행한 연구에 따르면 컴퓨터 구입을 위하여 바우처를 지급받은 (저소득층) 가정의 어린이들은 수학, 영어, 루마니아어 성적이 하락했다는 매우 유의미한 증거를 보였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컴퓨터 작동기술 향상이라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는 점이다.

지난 달에 발표된 듀크대학 연구팀의 연구 결과도 유사하다. 초고속인터넷서비스의 도입이 학생들의 수학과 읽기능력을 떨어뜨렸는데 특이한 점은 이러한 부정적인 효과가 주로 저소득층 가정에 국한되어 나타났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은 부모들의 감독이 저소득층 가정에서는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못 하기 때문이라고 가정하였다. 이들 가정에서는 컴퓨터가 공부시간을 줄이고 숙제가 아닌 오락에 사용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텍사스주에서 2천만불(약240억원)을 들여 4년간 42개 학교를 대상으로 행한 대규모 실험에서도 나눠준 노트북 컴퓨터를 집으로 가져가는 것이 허용된 학교의 학생들은 쓰기 점수가 낮아졌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떨까' 하는 마음에 '저소득층 컴퓨터 보급'이라는 키워드로 인터넷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놀랍게도 우리나라 전국의 교육관청과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디지털 디바이드'를 줄이려는 고민을 가지고 많은 예산을 이미 수년 전부터 쏟아붓고 있었다. 저소득층 가정에 컴퓨터를 무상으로 보급하고 인터넷 통신비를 지원함으로써 학생이 속한 가정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그 고통이 대물림되지 않도록 배려해 온 것이다. 그러한 지원과 배려가 오히려 저소득층 학생들의 학업성적을 떨어뜨려 사회경제적 격차를 더욱 확대시킬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더욱  아쉬운 것은 이러한 지원책은 그 효과에 대한 장기적인 분석이나 연구, 실험이 없이 정책 공급자의 상상력와 정의감에 따라 일정에 쫓겨 성급하게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미국이 2000만불을 지출하면서 정책 효과를 분석한다면 우리도 최소한 100만불 정도의 예산이라도 써서 이를 검증해 봐야하지 않을까? (GDP 규모로 볼 때 우리나라는 미국의 17분의 1이다.)

공공기관이 민간에 대한 조사와 분석을 등한히 하여 해결할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직 '트렌드 마인드'가 부족한 탓이며, 아직 우리나라에서 공급자 위주의 주먹구구 정책이 통하는 것은 공공부문이 소비자 선택의 무풍지대에서 안주해 왔기 때문이라는 김난도 교수의 지적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Saturday, 10 July 2010

월드컵 강팀으로부터 배우는 교훈?

이번 주 7월 10일 토요일자 조선일보 위클리비즈(Weekly BIZ) 섹션에 '당신의 회사, 연전연승하고 싶은가? 월드컵 강팀서 배워라' 라는 글이 실렸다.

이 글의 주장은 이번 2010 월드컵 강팀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네 가지 교훈을 M/E/M/O로 요약하면서  문화적 다양성을 통합(Muticultural)하고, 구성원의 잠재력을 이끌어 내고(Enabling Leadership), 자신감 부족과 자만심도 경계하면서(Mentality), 인재간 부서간 소통과 교류를 통해 조직력(Organizational Power)을 키우는 것이 기업경영에서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단 영어 조어부터 이상하다. Multicultural이라는 형용사와 세 개의 명사 및 명사구를 병치시켰다. 굳이 만들어 보자면 Multicultural Background 정도로 쓰면 댓구가 되겠다.

그런데, 이 기사의 보다 큰 문제점은 내용 하나하나가 매우 억지스럽다는 것이다. 내용은 그럴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무리하게 꿰맞춘 것이 눈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나씩 살펴보자.

1. Multicultural?
스페인 팀이 강한 것은 마드리드 출신인 보스케 감독이 문화적 배타성을 극복하고 독일전에서 바르셀로나 출신을 7명이나 선발진으로 중용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바르셀로나팀 7명(비야, 피케, 푸욜, 이니에스타, 사비, 부스케스, 페드로) 중에서 문화적 배타성이 문제가 되는 카탈루냐 출신은 4명(피케, 푸욜, 사비, 부스케스)에 불과하다. 이 선수들 중에서도  비야는 09/10시즌이 끝나고 이번 월드컵 직전에 발렌시아에서 바르셀로나로 이적했으므로 엄밀히 바르셀로나 출신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또한, 페드로는 토레스의 부진으로 겨우 출전한 것이다.
(참고로 그동안 선수선발에 많은 돈을 쏟아부어왔던 바르셀로나팀은 팀선수 중 이번 월드컵에  14명이 각국의 국가대표로 출전할 만큼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전 세계 프로팀 중 최다 규모다. 잘 하는 선수들이 많으니 대표팀에서 많이 뛸 수 밖에 없다.)

독일 대표팀도 90년대 말까지와 다르게 2000년대부터 타국가 이주노동자 출신들을 중용했다고 지적했다. 외부인재 수혈로 순혈주의를 극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독일팀은 '순혈주의'를 고집했던 90년대까지만 세번의 월드컵 우승을 기록했다. 그 이후로도 준우승, 3위로 잘 하긴 했지만 우승은 하지 못 했다.

2. Enabling Leadership?
허정무 감독이나 독일의 뢰프감독은 이네이블링 리더십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했다. 요즘 세상에 일방적인 리더십보다는 이러한 이네이블링 리더십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공감한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쓸 때에는 뭔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사례나 통계가 뒷받침되었어야 했다. 뢰프감독의 리더십을 그렇게 평가한 이유는 독일 신문에서 그렇게 평가했기 때문이라는 것 밖에는 없지 않은가?

3. Mentality?
이번 월드컵에서 남미와 아프리카팀의 몰락은 자신감 부족이거나 자만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탈락에 대해 '지도자의 오만', '사생활 방기' 같은  단어를 씀으로써 논리를 정당화하고 있다.

네덜란드에게 1점차로 석패했던 브라질이 만약 그 경기에서 자책골이 없었고 승리까지 했다면 브라질 둥가 감독은 '스타 선수'를 선발하지 않았던 오만에 빠진 지도자라는 평판 대신 네임밸류에 연연해 하지 않고 실력위주로 선수를 구성한 안목있는 감독이라는 명성을 얻었을 것이다.

4. Organizational Power?
남미의 몰락은 조직력의 부족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끈끈한 조직력은 소통의 산물'이라 '4강팀인 스페인, 네덜란드, 독일 대표팀 선수들은 대부분 자국 리그에서 뛰는 국내파들'이기 때문에 강한 조직력을 보여줬다고 했다. 그렇다면 100% 자국 리그 선수로 구성된 잉글랜드와 이탈리아는 왜 4강은 커녕 8강, 16강에도 못 올라갔는가?

이번 월드컵 출전선수 736명 중에는 잉글랜드리그에 117명, 독일리그에 84명, 이탈리아리그에 80명, 스페인리그에 59명이 소속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 빅리그에 대부분 선수들이 속해 있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1년에 한두 번 만나기도 어려운'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대표팀 선수 중 자국리그에 속한 선수는 각각 3, 6, 2, 4명에 불과하다. 이들 리그는 빅리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루과이는 이탈리아나 잉글랜드보다 좋은 성적인 4위에 올랐다. 2002년 브라질팀은 우승까지 했다. 갖다 붙여도 너무 갖다 붙였다.

월드컵은 16강 이상은 토너먼트다. 의외성이 많은 축구경기 중에서도 토너먼트에서는 예상치 않은 결과가 더 자주 발생한다. 대진 운이나 경기 운도 큰 원인이 될 수 있고, 팀원들의 축구 경기를 대하는 자세나 순간순간 상황에 따른 대처능력과 개인기, 신체능력이 달라서일 수도 있다. 그만큼 축구경기는 그 결과를 놓고 원인분석이나 성공의 특성을 유형화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나마 설명이 가능한 변수는 신체능력의 대리변수가 될 수 있는 '나이'다. 4강팀의 평균 연령은 스페인 25세, 독일 24세, 우루과이 26세, 네덜란드 27세이다. 중간에 탈락한 브라질, 잉글랜드, 이탈리아는 평균 연령이 28세, 아르헨티나나 프랑스는 27세이다. 그러나 이것도 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경우 반박되기 쉽다. 나이가 젊다는 것은 경험이 부족하다는 다른 표현이므로... 아무튼 이렇기 때문에 보다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써야 한다.)


그런데 이 기사는 상황을 너무 입맛에 맞게 꿰맞췄다. M/E/M/O 이렇게 4가지로 기사의 틀을 구성한 후 거기에다가 사실을 무리하게 갖다 붙였다. 이런 유형의 기사는 보다 정확한 팩트와 통계, 그리고 논리적(필요하다면 학문적인) 근거를 통해서 분석하고 연구한 후에 제시되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뻔 했다. 그것도 월드컵이 끝난 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여러 명이 토론한 결과로 작성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위클리비즈를 읽는 독자들은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이런 걸 기대한다.

만약 이번 월드컵 4강팀이 유럽팀들 대신 남미나 아프리카팀으로 구성되었다면 이 기사는 다음의 소설과 같이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 월드컵에서는 자국리그 소속선수가 많은 이탈리아, 독일,  잉글랜드는 몰락한 반면, 타국 리그에 속해 다른 축구문화를 다양하게 경험한 선수가 많은 브라질, 아르헨티나, 가나 팀이 강세를 보였다. 이는 현대 축구가 단순한 조직력 대신 개개인의 능력과 팀 전술, 다양한 경험이 조화될 경우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Saturday, 3 July 2010

The New York Forum – What does the rise of Asia mean for Western Economies and Companies?

카필라노 흔들다리 (Capilano Suspension Bridge)

'스웨이(Sway)' (Ori Brafman & Rom Brafman)라는 책 5장에 소개된 카필라노 현수교 (Capilano Suspension Bridge)에서의 실험 내용은

캐나다 브리티쉬컬럼비아대학의 D.Dutton과 A.Aron의 1974년 논문 'Some evidence for heightened sexual attraction under conditions of high anxiety'를 인용한 것이다.

높은 계곡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현수교를 건널 때 생리적으로 느끼는 불안감이 이성에 대한 관심과 연애감정을 유발한다는 게 이 책과 논문의 결론이다. 우리도 잘 모르는 사이에 인간의 심리는 생리현상으로부터 밀접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스웨이'는 매우 흥미있게 읽었던 책이고 카필라노 흔들다리의 사례도 기억에 많이 남아 지난 봄 캐나다 밴쿠버 방문했을 때 시간을 내서 카필라노 계곡을 찾아가 봤다.

하지만, 너무 기대를 한 탓인지, 이 정도 높이와 길이의 다리를 건넌다고 사랑의 감정이 생기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발을 뗄 때마다 다리는 끊어질 것처럼 불안정하게 흔들거린다. 마음이 조마조마해지고 심장이 빨리 뛰며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스웨이, p.137)


이와 같은 책의 표현대로라면 나도 뭔가 느꼈어야 하는데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그러한 감정을 느낄 만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다.

혹시 논문이 발표되었던 1974년 당시에는 '아슬아슬, 짜릿짜릿함'을 느낄 만큼 매우 부실하게 설치되어 있던

이 다리가 그 이후로 튼튼하게 보강되었던 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 보면서,

그들의 책에 이 논문을 인용하여 논문보다 더 실감나게 썼던 브래프먼 형제는 실제 카필라노 계곡을 방문해 본 경험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Tuesday, 29 June 2010

왜 잉글랜드는 월드컵에서 계속 실패하는가?

축구의 종가, 잉글랜드가 이번 월드컵에서는 8강에도 못 올라갔다. 1라운드에서 미국, 알제리와 비긴 후 슬로베니아에게 간신히 이겨 16강에 조2위로 진출했지만, 라이벌 독일한테 4:1 망신스러운 스코어로 져서 이번 월드컵을 마감했다.

선수 면면을 보면 화려한데 왜 잉글랜드는 월드컵에서 힘을 못 쓸까? 같은 고민을 Freakonomics의 공동 저자 스티븐 더브너(Stephen Dubner)가 'Why Does England Lose?'라는 글을 통해 남겼다.

그의 말대로 100가지 이상의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여러 원인 중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English Premier League: EPL)에 외국인 선수가 너무 많이 뛰기 때문에 EPL에서 밀려난 자국선수들이 높은 수준의 경기력을 경험하지 못 한 것에도 원인이 있다는 사커노믹스(SOCCERNOMICS)란 책의 내용을 인용한 견해에는 일정 부분 공감한다.

다만, 잉글랜드가 월드컵에서 번번이 실패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로 나는 잉글랜드인들이 태생적으로 축구에 소질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잉글랜드가 13번의 월드컵 출전 중 잉글랜드에서 개최된 1966년 대회에서만 우승을 하였을 뿐, 그 이후 1990년 이탈리아 대회에서 4위한 것이 그나마 가장 좋은 결과이며 나머지 대회에서는 매번 8위 안팎의 순위를 얻었다.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잉글랜드는 8강 전문팀이라는 얘기다.

(1966년 우승 당시에도 결승전에서 독일과 만나 연장전에서 얻은 잉글랜드 Geoff Hurst의 세번째 골이 논란이 많았는데, 이번 2010 남아공 대회의 독일전에서 잉글랜드 람파드(F. Lampard) 골이 인정되지 않은 것과 반대로 크로스바를 맞고 골라인에 떨어진 Hurst의 애매한 슛이 골로 인정되었다. 결국 석연치 않은 이 판정 덕분에 주최국 잉글랜드가 4:2로 이겨 우승을 하였다.)

이러한 월드컵 성적은 그들의 축구 인프라와 축구에 대한 열정, 엄청난 숫자의 축구팀과 선수들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결과다.

전국단위의 리그만 총 5개로 EPL로 명칭되는 1부리그부터 Conference National로 불리는 5부리그까지 총 116개 팀(club)이 운영되고 있다. 또한 5부리그 밑으로도 각 지역별로 운영되는 6부에서 21부까지 수많은 리그들이 있는데 잉글랜드에만 140개 이상의 리그와 7천개 이상의 팀(Club)이 운영된다고 하니 축구 시스템 전체규모는 얼른 상상해 내기 쉽지 않다.

더욱 대단한 것은 각 지역과 학교별로 어린이들이 유치원 시절부터 각종 축구클럽에 속해 공을 찬다는 사실이다. (축구에 큰 관심이 없는 우리 아들녀석조차도 영국에 있을 때 매주 토요일 마다 1.5파운드씩 내고 축구클럽에 참가하곤 했다.) 나라 전체가 축구클럽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축구에 대해서 만큼은 광적이다.

각국의 리그 시스템을 보면 잉글랜드처럼 여러 단계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나라도 없다. 월드컵 단골 우승국가인 브라질, 아르헨티나, 이탈리아도 잉글랜드보다 리그 시스템이 단순하며 클럽숫자도 훨씬 적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1~3부 3개리그 48개 팀으로 단촐하게 운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도 역대 월드컵 참가 최고 성적이 4위이고 남아공대회에서 16강까지 올랐으니 잉글랜드와 별반 수준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렇게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축구종가'가 최근 10년간 프리미어리그에서 자국 출신 득점왕을 한차례도 배출하지 못 하였으며, 최근 5년간 매 시즌별 득점순위 5위 이내 선수 중 잉글랜드 출신 선수는 람파드, 제랄드(S.Gerrard), 루니(W. Rooney), 벤트(D. Bent) 4명 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쉽게 믿기지 않는다.

덧붙여 말하면 프리미어리그 20개 팀 중 자국인 감독은 7명에 불과하고 월드컵 대표팀 감독도 2002년, 2006년 스웨덴인(Sven-Göran Eriksson)에 이어 이번에는 이탈리아인(Fabio Capella)이 맡았다. 이 지경이니 잉글랜드는 넘쳐나는 축구인들 속에서도 이래저래 늘 인물난에 시달리는 상황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남의 나라 축구팀을 이 정도로 생각해 주는 건 거의 '기우' 수준으로 쓸데 없는 짓이긴 하다) English들은 축구를 좋아하기만 했지 축구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젬병'인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온 국민이 어릴 때부터 수십만 개의 클럽에서 죽어라고 축구해서 겨우 건져낸 선수가 루니, 람파드이고 왕년의 베컴(D.Beckham), 쉬어러(A. Shearer) 정도다.

더브너(S. Dubner)의 글에 있는 주장처럼 프리미어리그에 외국인선수가 많이 뛰어 자국선수들이 밀려난 것이 아니라, 반대로 7000여개 클럽에서 뛰는 수많은 잉글랜드인들 중에서 프리미어리그 수준을 뒷받침할 자국선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외국인 선수들을 영입할 수 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다.

잉글랜드의 우수한 선수들이 더 우수한 외국인 선수들 때문에 프리미어 리그에서 밀려난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 국가대표팀원 중 일부는 (수준이 잉글랜드보다 떨어지는) 다른 나라 리그의 클럽에 소속된 선수들도 있을 법한데 현재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원은 100% 자국의 프리미어 리그 소속이다. 즉, 리그에서 외국인 선수를 너무 많이 뽑아 밀려난 선수는 없으며 대표로 뽑을 만한 선수는 그 선수들이 전부라는 얘기가 아닌가?

(최근 잉글랜드 선수로 타국 리그에서 뛴 적이 있는 선수는 전 국가대표인 데이빗 베컴(레알 마드리드, LA갤럭시), 마이클 오웬(M. Owen 레알 마드리드), 오웬 하그리브스(O. Hargreaves 바이에른 뮌헨) 정도다.)

내 주장이 조금이라도 그럴 듯한 것이라면 잉글랜드가 주로 월드컵 8강에 머문(오른) 것도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은 대단한 성과였던 셈이다.


* 참고로, EPL의 최근 10년시즌동안 득점왕은 00/01 Jimmy Floyd Hasselbaink, 01/02, 03/04, 04/05, 05/06 Thierry Henry 06/07, 09/10 Didier Drogba, 07/08 Christiano Ronaldo, 08/09 Nicolas Anelka

Monday, 28 June 2010

Pat Metheny - Orchestrion



지난 6월 초 LG아트센터에서 내한공연을 열였던 팻 메스니(Pat Metheny)의 Orchestrion 소개 영상이다.  동영상 첫부분부터 나오는 곡이 금년 1월에 발매된 앨범 Orchestrion의 첫번째 곡 'Orchestrion'이다.

오케스트리온(Orchestrion)이란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시도되었던 오케스트라와 같은 집단 연주를 자동적으로 재현하는 기계적 장치를 일컫는데 팻 메스니에 의해서 이번에 더욱 정교하게 구현되었다고 한다. Improvisation을 중요한 요소로 삼는 재즈음악이 기계장치와 더 친숙하다니 의외다.

2002년 9월에 그의 내한공연을 가 봤지만, 금년 공연은 놓치게 되어 앨범 구입과 그 CD음악으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2002년 같은 무대에서 팻 메스니 외에 6명이 들려주었던 꽉 찬 사운드를 이번엔 기계장치가 대신하였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앨범에 Associate Producer로 참여한 Steve Rodby가 바로 그 당시 Pat Metheny Group의 Bassist였던 그 사람일 것이다.

아무튼, 21년 전 Offramp(1982)라는 앨범에 실린 'Are you going with me'라는 곡을 처음 듣고 충격을 받은 이후 그의 음악을 쫓아다니며 들어보지만 그의 음악적 시도는 언제나 새롭고 그 성과도 매번 훌륭하다.  팻 메스니는 우리에게 '이런 게 바로 혁신이야' 라고 일러주는 것 같다.

Sunday, 27 June 2010

아쉽지만 월드컵 끝!

약 보름간을 들뜨게 했던 우리들의 월드컵이 끝났다.
잘 했다. 세계 16강이 아무나 하는 일인가?
반에서 16등, 전교에서 16등도 어려운 일인데 우리팀이 세계 16등 안에 들었다.

월드컵 기간 이외에는 아무런 성원이나 관심도 없었지만 우리 대표팀은 나름대로 준비를 잘 했고 선전했다.

월드컵 기간이 되면 그동안 눈에 안 보이던 축구 전문가와 광팬들이 갑자기 늘어난다.
한 게임이라도 지면 수비가 무너졌느니, 4-2-3-1 포메이션이 잘 못 됐다느니 뭐 그리 아는 것도 많고 그리 불만들도 많은지...

할 얘기가 없으면 등장하는 문구가 '수비가 무너져', 아니면 '수비수 아무개가 누구를 놓쳐 골을 내줬다'는 둥 상대의 개인능력이나 팀의 공격수준은 고려없이 우리팀 수비능력에 대한 힐책성 얘기다.

골 먹는다고 무조건 수비력이 약하다는 평가는 불합리하다. 어떤 강팀이라도 골을 먹는 순간 만큼은 수비가 무너진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골은 나올 수가 없다. 그런 순간들이 모여 승패가 갈리는 게 스포츠 아니던가? 공격이란 게 다름 아닌 수비를 무너뜨린 후 골을 넣는 것이므로 수비가 강한 팀이더라도 공격이 더 강하면 수비는 무너진다. 우리는 참 단순하게도 수비가 무너졌다는 얘기, 수비수가 공격수를 놓쳤다는 얘기는 꼭 지는 경기에서만 강조한다.

4-4-2 같은 포메이션도 경기 매 순간 새롭게 발생하는 상황을 대비하는 기본적인 틀일 뿐, 그 틀을 모든 상황에 맞춰 완벽하게 유지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특정 포메이션이 다른 포메이션보다 강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유기적으로 이뤄지는 팀플레이의 바탕에 불과한 것을 만고불변의 원리처럼 떠드는 어중이 전문가들은 축구를 몸소 한 경기라도 해 본 사람인지 의문이다. (나를 포함해서) 전문가인 양 떠들어대는 주장들을 뒤집어 보면 그것들은 아주 단순하고 빈약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뭐 대단한 전문가인 양 호들갑 떠는 사람들 중에 평소 클럽 연간 회원권이라도 구입해서 소리없이 경기장에 가서 응원이라도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또 그렇게 무관심 속에서 버티다가 다음 월드컵 기간이 돌아왔을 때 이런 가짜 전문가들과 입만 살아있는 광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할 우리 축구팀이 그래서 불쌍하다. 그래도 어찌하랴! 이들도 우리 국민인 것을.

Wednesday, 23 June 2010

클러치 플레이어와 진단편향

클러치 플레이어(Clutch Player)란 게임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선수를 말한다. 코비 브라이언트(Kobe Bryant)나 왕년의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 내가 좋아하는 두산 베어스의 김동주 같은 유형의 선수들이 클러치 플레이어다.

댄 애리얼리(Dan Ariely)는 미 프로농구(NBA)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는 클러치 플레이어가 다른 선수들보다 과연 성과가 좋은지 확인하는 연구를 했다고 한다.

박빙의 승부을 벌인 경기에서 상대적으로 긴장감이 덜한 전반 종료 직전 5분간 상황과 경기종료 직전 5분간의 상황을 비교 분석한 결과,

평범한 선수들이 두 상황간에서 득점수에 거의 차이가 없었던데 비해 클러치 플레이어들은 경기 막판 5분간의 득점이 더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역시 클러치 플레이어가 다르군'하는 일반적인 예상이 진실의 끝일까?

댄 애리얼리는 NBA의 클러치 플레이어가 경기 막판 5분간의 득점력이 더 좋아지는 것을 보고, 그들의 우수한 능력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슛 성공확률이 좋아졌거나 성공확률 보다는 슛팅 시도횟수가 증가했거나...두 개의 가능성 중 하나의 결과로 인해 득점이 많아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두가지 가능성을 놓고 분석한 결과 이 연구자는 클러치 플레이어들이 경기 막바지에 득점력이 좋아진 것은 단지 슛팅 시도횟수가 증가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결론은 이 블로그의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금융전문가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두뇌활동을 통한 인지능력보다 (단순 기계조작능력과 같이) 육체적인 활동이 많은 고연봉의 농구선수들조차 중요한 순간에 슛팅을 많이 시도해서 성과가 좋은 것일 뿐이지 특별히 남들보다 우수한 기술로 인해 득점력(성과)이 높아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며

농구선수들도 이 정도일진대, 두뇌활동이 많은 금융전문가들도 돈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중요한 순간에 그들이 우수한 능력과 성과를 발휘할 가능성은 더욱 더 낮다는 것이다.

(육체활동인 단순 기계조작능력 테스트에서는 보너스가 클수록 성적이 좋아진 반면, 인지능력 테스트와 같이 정신적인 활동이 필요한 경우는 보너스를 많이 줄수록 더 나쁜 성적을 보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즉,성과에 따라 엄청난 보너스를 받는 금융기관 전문가들은 클러치 플레이어로 불리우는 우수한 운동선수들보다 훨씬 그 숫자가 많다는 사실까지 주목한다면, 그들에게 특별히 높은 연봉이나 보너스를 지급할 이유가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연구결과는 '스웨이(Sway, Ori & Rom Brafman 저)'란 책에 소개된 경제학자 Barry Staw와 Ha Hoang의 논문 내용인 농구선수에 대한 진단편향(Diagnosis Bias) 문제와 어느 정도 상통한다.

스토와 호앙은 NBA선수의 출전시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득점력(scoring), 강인함(toughness)이나 순발력(quickness)과 같은 선수의 능력이나 성적이 아니고 드래프트 지명 순서(draft order)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들은 '드래프트 순서가 하나씩 뒤쳐질 때마다 출전시간은 최대 23분씩 감소'하며 1차 드래프트 선발선수는 2차 선발선수에 비해 평균 3.3년 정도 더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최초 가졌던 의견에 근거해서 사람, 아이디어, 사물 등에 대해 일정한 인식표(label)를 붙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을 진단편향(diagonis bias)이라고 한다.

요약해서 이들 두 연구결과를 연결하면, 유명한 선수들은 일단 1차 드래프트 선수라는 이유만으로 출전시간이 늘어나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다른 선수보다 슛 시도횟수가 많아지며 그래서 득점이 많아지는 것인데도 이것을 그들의 능력에 따른 당연한 성과로 인식하여 그들에게 높은 연봉이 지급된다고 하는 일련의 개연성이 도출될 수 있다.

일단은 1차 드래프트에 뽑혀야, 일단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름있는 대학을 졸업하고 번지르르한 직업을 가져야, 일단은 성형수술을 해서라도 잘 생기고 봐야...하는 우리 세태가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보너스의 함정: 성과급이 과연 성과를 향상시키는가?

Dan Ariely: Irrational Economics from PopTech on Vimeo.




'상식 밖의 경제학 (Predictably Irrational)'의 저자이자 행태경제학자인 댄 애리얼리(Dan Ariely)의 최신작 'The Upside of Irrationality'가 2010년에 출판되었다. 아마도 곧 우리나라에도 번역본이 소개될 것 같다. (지금쯤 누군가 열심히 번역하고 있을 것이다.)

우연히 그의 글과 블로그의 동영상을 통해 그 내용의 일부를 엿볼 수 있었다.

최근 글로벌 경제위기에서조차 위기의 주범인 금융기관의 CEO들이 엄청난 보너스를 받았는데 그것이 정당한가 하는 의문에서 그의 연구가 출발한 것이 아닌가 싶다. 즉, 그의 관심은 '보너스가 성과를 올리는데 그만한 효과가 있는가?'이다.

댄 애리얼리는 인도(India)에서 수행한 실험에서 하루치 급료만큼의 보너스(낮은 보너스)를 받는 그룹, 2주일치 급료에 해당하는 보너스(중간 보너스)를 받는 그룹, 5개월치 급료를 보너스(엄청난 보너스)로 받는 그룹으로 나누어, 퍼즐 끼워맞추기, 숫자 맞추기와 같은 놀이를 진행하면서 아주 우수한 성적을 거둘 경우 보너스를 지급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 결과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중간 보너스' 그룹의 성적은 '낮은 보너스' 그룹의 성적과 비슷하게 나왔으며, 더욱 의외였던 것은 '엄청난 보너스' 그룹의 성적은 나머지 두 그룹보다도 오히려 결과가 더 안 좋게 나왔다는 점이다.




MIT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는데, 숫자를 더하기와 같은 인지능력(congnitive skill) 테스트와 키보드 빨리 누르기와 같은 단순 기계조작능력(mechanical skill) 테스트를 각각 성과가 좋을 경우 보너스를 많이 받는 그룹과 보너스를 조금 받는 그룹으로 나누어 실험했더니, 단순 기계조작능력 테스트에서는 보너스가 클수록 성적이 좋아진 반면, 인지능력 테스트와 같이 정신적인 활동이 필요한 경우는 인도에서의 실험과 같이 보너스를 많이 줄수록 더 나쁜 성적을 보였다는 것이다.




즉 그의 실험의 결과는 인센티브가 일정 수준이상 증가하면 위 그래프의 빨간 색 곡선과 같이 성과는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실험에서, 철자바꾸기 게임을 조용한 독방에서 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수행하게 했을 때 피실험자들의 성적은 오히려 더 나빴다고 하는데
댄 애리얼리의 결론은 타인의 평가도 보너스와 같은 효과를 주기 때문에 단순 반복업무에는 동기부여가 되지만, 어느 한계점을 지나면 다른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는 스트레스가 의욕이나 동기유발효과를 압도하여 역효과가 난다는 것이다.

특정 직원들에 대해 많은 성과급을 지급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그룹 회장의 견해가 옳을 수도 있음을 댄 애리얼리의 연구는 확인해 주고 있다.

또한, 에드워드 데시(Edward Deci) 교수의 자기 결정 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보상을 얻거나 감시와 평가를 받을 경우 통제받고 있음을 느끼게 되므로 자율적, 내재적 동기가 떨어지게 된다는 견해와도 일치한다. 보상이 사라지면 보상에 따르는 효과도 즉시 사라지게 되므로 지속적인 성과도출을 위해서는 보상이나 감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급료에 대한 6가지 위험한 신화(Six dangerous myths about pay)'라는 글을 통해서 개인적인 인센티브 지급은 팀워크를 해치고 단기적인 것에만 집중하게 해 성과급이 성과를 향상시킨다는 믿음은 잘 못된 것이라는 스탠포드 비즈니스스쿨의 제프리 페퍼(Jeffrey Pfeffer)교수의 지적,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행태경제학자 다니엘 카네만(Daniel Kahneman) 교수의 견해도 다 같은 맥락이다.

앞으로는 심지어 CEO의 성과급이나 보너스, 연봉조차도 고어텍스로 유명한 W.L.고어(Gore)사의 사례처럼 동료들의 평가나 회의를 통해 결정해서 지나친 성과급에 따른 폐해를 줄여 나가는 것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바른 선택 중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관련 글: What’s the Value of a Big Bonus?

혼창통- 당신은 이 셋을 가졌는가?

이 글의 제목은 쌤앤파커스 출판사에서 금년 2월 발간한
조선일보 위클리비즈의 편집장 이지훈 기자가 쓴 책의 제목이다.

제목과 링크되어 있는 기사가 이 책의 출발점이 된 듯하다.

내가 위클리비즈의 열혈 독자인 탓에 대부분의 내용이 익숙한 것들이라 책은 쉽게 읽혔지만,

아쉬운 것은 대부분 위클리비즈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 근거한 내용들이어서인지 깊이를 크게 느낄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책 말미에 실린 참고문헌의 내용도 정교하거나 풍부하지 않아서 (이게 우리나라 도서들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다) 아쉬웠다.

일류기업 경영자와 세계 경영학계의 구루(Guru)들의 명언들을
'혼/창/통'의 세 키워드에 따라 잘 분류해서 담아 놓아 핵심정리 요약집을 읽은 듯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평소 이 분야의 지식에 대해 궁금했던 독자들한테는 매우 유용할 것 같다.

다만, 조선일보 소속기자들이 쓴 위클리비즈의 기사가 주요 참고문헌이 되고, 조선일보 기자인 저자만의 고유한 논리, 주장이 크게 추가된 것이 없는 이상, 이 책은 신문사의 이름(예를들어, 조선일보 위클리비즈팀)으로 출판되는 것이 맞지 않나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위클리비즈팀의 이름으로 위클리비즈의 기사들을 죽 묶어 낸 책도 따로 나왔었구나. 그래도 '혼창통'이라는 책 표지에 '이지훈 지음'이라는 표현은 영 어색하다. '엮음' 정도가 맞지 않을까?)

Tuesday, 22 June 2010

대추 한 알

-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 『붉디 붉은 호랑이』(애지, 2005)



* 이 시는 작년 9월 광화문 교보빌딩 벽 글판에 붙은 글이라고 합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작가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91212010322371910020

Saturday, 19 June 2010

즐거운 놀이: 월드컵 축구 스코어 맞히기

월드컵이 열리기 전에 작성된 네이버 지식인의 답변글이 우리나라 팀의 월드컵 스코어를 기가 막히게 예언했다고들 난리다.

이 답변을 쓴 사람은 첫 경기 그리스전 스코어 2:0에 이어, 아르헨티나 전 1:4 패배까지 정확하게 맞혔다.

아래의 글이 바로 화제의 예언 글

* 한국 16강 현실적으로 가능성


그렇다면, 이 예언자(?)의 세번째 예언인 나이지리아전 2:1 승리 전망까지 들어 맞을까?

우리나라 사람 5천만명 중 축구에 관심있는 천만명이 축구 스코어를 예상했다고 하자.

이 사람들 중 두 경기를 연속해서 맞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먼저, 그리스 전에 대해서는
그리스 전 2:0 승리를 약 23.9%의 사람이 예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전 1:4 패배는 그 보다 훨씬 적은 사람이 예상했다. 스포츠토토에서는 약 0.33% 정도(29만 여명 중 967명)만이 1:4 스코어를 예상했단다. (연합인포맥스에서 실시한 901명의 조사에서는 아무도 못 맞혔다고 한다.)

그렇다면, 천만명 중 두 경기를 모두 정확하게 예상한 사람은 약 8000명(정확히는 7917명)이라는 얘기다. (1000만*23.9%*0.33%)

즉, 예언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국민 중에는 두 경기를 정확하게 맞힌 사람이 의외로 그 숫자가 꽤 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네이버의 예언자의 말대로 나이지리아 전 2:1 승리를 그리스전에서 2:1스코어를 예상한 사람 비율을 적용하여 43.5%의 사람들이 예상한다고 하면, 세경기를 모두 정확하게 맞힐 사람은 천만명 중 약 3400명이나 된다.

그러니까, 나머지 999만 여명의 사람들에게는 이들 3400명이 거의 신통한 점쟁이 정도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여기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는데, 이 예상치가 정확한 실력을 근거로 판단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객관적인 실력만 가지고 판단하면 4:1 아르헨티나 승리 예상자 수는 더 올라갔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아르헨티나가 우세한데도 우리는 '한국이 승리해야 한다' 라는 희망을 자신의 전망치에 더해 예측을 하게 된다. (위의 사이트를 보면 전체 3분의 2가 한국 승리 또는 무승부를 예상했다.)

또한, 우리가 스코어를 예상할 때 설문조사의 경우처럼 집중화/관대화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즉, 3:0 과 같이 보다 극단적인 스코어 보다는 2:1과 같이 양팀에 적당하게 골을 나눠 놓은 스코어를 선호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것은 능히 예상이 가능하다.

거기에, 평소에 축구에 대해 관심도 없고 우리나라 축구팀은 물론 아르헨티나나 그리스 실력이 어떤지 모르는 사람들 조차 월드컵 시즌만 되면 내기에 동참한다는 사실이 확률의 정확도를 떨어뜨린다.

여기에 덧붙여 남들이 이렇게 부정확한 기준에 따라 예상했는데도 그걸 따라 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 오류를 증폭시킨다.

* 관련 기사: 스포츠 정신분석학으로 본 내기 심리… 무조건 한국이 이긴다고 거는 당신은?(조선일보, 2010.6.18)


실제 내기를 거는 상황이 되면, 위에 소개된 기사 내용처럼 '현실형' 인간들보다 '의존형' '자기도취형'이 많을 것이므로 더더욱 예측이 들어맞을 확률은 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저 위에 링크한 사이트들에 나온 실제 예상치를 보면 그대로 드러난다.

이러한 오류나 거품을 걷어내면 1000만명 중 두경기 스코어를 모두 맞힐 사람은 훨씬 늘어날테지만, 현실에서는 두 경기 스코어를 모두 맞히는 사람이 '소름 돋는 예언자', '신', '시간여행자'로 불리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네이버 예언자의 말처럼 우리나라가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2:1 정도로 이겨서 16강에 올라가 줬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바람이다. 우리나라가 지면 무조건 탈락하게 되어 스코어 예상하기라는 즐거운 놀이도 끝나게 되니까...


* [읽어볼만 한 글] 핵폭탄 연구하던 수학자들 축구를 분석하다

Saturday, 5 June 2010

집시의 기도

집시의 기도

- 충정로 사랑방에서 한동안 기거했던 어느 노숙인의 시

둥지를 잃은 집시에게는
찾아오는 밤이 두렵다.
타인이 보는 석양의 아름다움도
집시에게는 두려움의 그림자일 뿐……

한때는 천방지축으로 일에 미쳐
하루해가 아쉬웠는데
모든 것 잃어버리고
사랑이란 이름의 띠로 매였던
피붙이들은 이산의 파편이 되어
가슴 저미는 회한을 안긴다.

굶어죽어도 얻어먹는 한술 밥은
결코 사양하겠노라 이를 깨물던
그 오기도 일곱 끼니의 굶주림 앞에
무너지고

무료급식소 대열에 서서……
행여 아는 이 조우할까 조바심하며
날짜 지난 신문지로 얼굴 숨기며
아려오는 가슴을 안고 숟가락 들고
목이 메는 아픔으로 한 끼니를 만난다.

그 많던 술친구도
그렇게도 갈 곳이 많았던 만남들도
인생을 강등당한 나에게
이제는 아무도 없다.

밤이 두려운 것은 어린아이만이 아니다.
50평생의 끝자리에서
잠자리를 걱정하며
석촌공원 긴 의자에 맥없이 앉으니
만감의 상념이 눈앞에서 춤을 춘다.
뒤엉킨 실타래처럼
난마의 세월들……

깡소주를 벗 삼아 물마시듯 벌컥대고
수치심 잃어버린 육신을
아무데나 눕힌다.
빨랫줄 서너 발 철물점에 사서
청계산 소나무에 걸고
비겁의 생을 마감하자니
눈물을 찍어내는 지어미와
두 아이가 "안 돼, 아빠! 안 돼"한다.

그래, 이제
다시 시작해야지
교만도 없고, 자랑도 없고
그저 주어진 생을 걸어가야지.
내달리다 넘어지지 말고
편하다고 주저앉지 말고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그날의 아름다움을 위해

걸어가야지……
걸어가야지……

Friday, 4 June 2010

퍼펙트게임 오심 - 스포츠가 주는 교훈

6월 2일 미국 프로야구(MLB) 경기에서 정말 재미난 사건이 있었다.
재미있었다기 보다는 보는 이에 따라서는 어처구니 없거나.... 광분할 만한 사건이라고 해야 맞겠다.

홈팀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아만도 갈라라가(Armando Galarraga)라는 투수가 9회초 마지막 수비 2아웃인 상황까지 26타자를 퍼펙트로 막아내고 있었다. (그 때까지 안타나 볼넷 등을 허용하지않아 아무도 1루에 출루한 사람이 없었다는 뜻)

그런데, 투아웃 1-1상황에서 상대팀의 27번째 마지막 타자 제이슨 도날드(Jason Donald, 추신수가 속해 있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신인 유격수)가 친 내야땅볼을 수비하는 과정에서 1루심(짐 조이스 Jim Joyce)은 1루수가 1루를 커버하러 들어간 투수에게 던진 공을 타자주자 세이프로 선언하여 메이저리그 역사상 21번째 퍼펙트게임을 바로 눈 앞에서 날려 버렸다.

그런데, 그 판정을 비디오로 다시 돌려보니 완벽한 아웃이었다는 것에서 사건이 커진다.


사건은 일파만파 확대되었지만,
그 다음 날 경기에서 타이거스 감독은 경기전 선수명단을 제출하는 일을 갈라라가에게 맡겨 그 전날 오심을 내린 심판 조이스와 만나게 한다. 사건 당사자인 둘은 서로 등을 두드리며, 화해했다고 하는데....

장면을 보자.

사실 별거 아닌 이야기일 수 있지만,
미국 사람들이 극적인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데 얼마나 탁월한 감각을 지녔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경기 후 나온 얘기들이다.

조이스 심판: 내 심판경력에서 가장 큰 판정실수. 내가 갈라라가의 퍼펙트게임을 빼앗고 말았다. 내 오심으로 퍼펙트게임을 놓친 갈라라가에게 미안하다.

갈라라가: 조이스가 나보다 더 괴로울 것. 인간은 완전하지 않으며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조이스도 그런 판정을 내리길 원하진 않았을 것.

백악관 대변인 로버트 깁스 Gibbs: 실수를 인정한 심판과 담대하게 반응한 투수의 모습은 매우 감동적(tremedously heartening). MLB가 갈라라가 선수에게 퍼펙트게임을 이룬 것으로 인정해 주길 바란다.

MLB 커미셔너 버드 셀리그 Bud Selig: Human element인 오심도 야구의 일부. 문제가 된 판정을 번복하지 않겠다. 대신 앞으로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비디오 판독을 확대하는 문제와 심판체계를 재검토하겠다.


퍼펙트게임, 9회 투아웃 마지막타자, 오심, 사과, 용서, 화해, 백악관의 개입과 원칙 고수....등등 이번 사건은 일부러 만들어 낸 이야기처럼 매력적인 요소들로 넘친다.

갈라라가의 말처럼 인간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수 후 대응하는 방식에 따라 감동을 주는 드라마로 끝날 수도 있고 실수보다 더 비참한 패배로 마무리될 수가 있다.

스포츠는 정직해서 이렇게 감동과 교훈을 준다.

Saturday, 22 May 2010

행복한 노래 듣기와 인터넷

최근 행복은 50세에 시작한다는 연구결과를 담은 기사가 실렸다.

http://www.telegraph.co.uk/health/healthnews/7733848/Happiness-begins-at-50-claims-new-research.html

나이가 들면서 분노, 걱정, 스트레스를 잘 억제하게 되어 이러한 나쁜 것들은 줄어드는 대신 행복, Well-being이 개선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가족, 친구들의 가치를 새삼 깨달으면서 긍정적인 생각을 더 많이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기점이 50세라니....

장황하게 이러한 기사 내용을 언급하는 것은 예전에 몰랐던 즐거움을 요즘 들어 하나 얻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생 시절에 음질이 썩 좋지 않았던 구닥다리 라디오로 흘러나오는 팝송을 녹음해서 즐겨 듣고는 했는데,

늘 그 가사가 궁금했으나, 당시에는 정확한 내용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서점의 팝송 책 - 요즘도 그런 책들이 있는지 궁금하다 - 을 봐도 영 가사가 무슨 뜻인지 해석되지 않았다.

내 영어실력이 짧은 탓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책에 담아 놓은 영어가사들이 엉터리가 많았다.

그 당시 라디오로 흘러나오던 팝송에 어린 내 가슴을 숨막히게 했던 가수가 있었으니,

Olivia Newton-John

Magic, Don't cry for me Argentina, Physical, Xanadu.....등등등 수많은 그녀의 히트곡

올리비아 뉴튼존은 아마도 팝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여가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순수&청아하면서도 그윽하고 또 섹시함까지도 가지고 있는 목소리...(그나저나...그녀의 노래를 알게 해준 내 짝꿍 '응찬'이란 녀석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그녀는 48년생이니 환갑을 넘긴 나이고 (내가 그녀의 노래를 듣던 시기에 그녀 나이는 33세였다), 영국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자란, 이후 두번 결혼하고....등등의 개인사와 함께

Physical이란 노래가사를 인터넷에서 찾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google과 wikipedia, youtube는 참 훌륭한 친구들이다)

가사를 다시금 읽어보니 그 당시 어린 소년인 내가 영어를 잘 했더라도...그 깊은 뜻을 음미해 듣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내용이다.

"대화도 충분히 나눴고, 레스토랑에도 같이 왔고 뭔가 암시하는 영화도 봤고 이제 더이상 할말도 없으니....physical한 걸로 들어가 보자...나도 참을 만큼 참았고, mentally한 것은 서로 충분이 나눴으니..이제 내안의 야성을 깨워달라....body로 talk하자..."

youtube.com을 통해 30년전 "Physical" 뮤직비디오를 보면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지금보기에는) 촌스러운 장면들이 연속되고 있지만, 내용은 그렇다...그 청초하면서도 사랑스런 목소리로 들려준 그 노래는 꽤나 의미심장(?)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이 노래가 당시 10주 동안이나 빌보드 정상을 지켰단다.

아무튼 즐겁다. 가사의 의미를 떠나서, 이제는 인터넷을 뒤져보면 그 땐 몰랐던 수많은 사실들을 찾아낼 수 있다. 그 여인이 그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 그 모습은 어떻게 변했는지, 그 당시 보기 힘들었던 뮤직비디오를 집 컴퓨터 앞에 앉아 편하게 볼 수 있고, 좋아했던 그녀의 음악을 인터넷에서 mp3파일을 구입해서 테이프 늘어질 걱정없이 반복해서 들을 수 있다.

내일 찾아 들어볼 또다른 노래는 보니 타일러(Bonnie Tyler)가 83년에 불렀던 'Total eclipse of the heart' 이다. 얼마전 아일랜드 4인조 남성보컬그룹인 Westlife가 다시 부른 이 노래를 듣고 바로 이 노래를 다시 찾아 들어봐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Turn around'를 반복했던 감미로운 남자 보컬은 누구인지도 확인해 볼 생각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들까지 바로 바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요즘...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행복한 시대를 살고 있는지 알까? 아니면, 뉴스의 내용처럼, (정보의 빈곤 속에서 70~80년대 민주화 산업화의 격변기에 젊은 날을 힘들게 보냈던 세대인) 지금의 50대가 더 행복할까?

* Don't cry for me Argentina는 유명한 작곡가 Andrew Lloyd Webber의 곡으로 뮤지컬 Evita에 올리기 전인 1976년 Julie Covington이란 가수가 최초로 세상에 발표하였다고 한다.

Friday, 21 May 2010

산책길 자전거 유감

저녁밥 먹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집 옆 산책길을 나선다.

냇가를 따라 조성된 산책길을 거닐 때마나 가장 신경쓰이는 것은
언제나 자전거다.
1.5미터 남짓의 좁은 산책길을 자전거족들과 나눠써야 하는 것이 불만이고 불안하다.

아무 불빛이나 신호도 없이 쌩쌩 달리는 자전거가 갑자기 등뒤에서 나타날 때 마다 살기를 느낀다.
눈이 부셔 직접 쳐다보기 힘든 불빛을 멀리서부터 휘두르며, 신경질적인 따르릉 소리까지 울려대며
내게 덤벼드는 자전거를 맞이하면 어느쪽으로 피해야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다.
....나는 자전거 탔으니 너는 무조건 비켜라...하는 식이다.

값비싼 자전거에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여러 명이 같이 다니니 더 용감해 지는 모양이다.

자전거족이나 보행자는 도로에서 더 위협적인 존재인 자동차에 구박받고 있는, 동병상련에 어찌보면 같은 처지라 서로 아껴 줄만도 한데...

더구나 이런 좁은 길을 보행자와 물리적 구분 없이 자전거와 꼭 나눠쓰도록 만들어 놔야 했을까?

어둑한 길에 라이트나 신호장비 없이 다니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
보행자가 우선이라는 큰 원칙 하에 자전거를 즐기는 데에도 어떤 룰이나 어떤 에티켓이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자전거는 찻길로만 다녀야 하고 자전거 운전자는 야광자켓과 신호장비, 헬멧 등 보호구를 갖추고
무엇보다도 보행자를 우선 보호해야 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그런 문화가 우리 땅에도 정착될 때가 되었다.